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
황량한 가을 바람이 몰아치며
모든 걸 다 거두어가는 11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도
괜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입니다
11월엔 누구도
절망감에 몸을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을 들녘이 황량해도
단지 가을걷이를 끝내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수확물이 그득한 곳간을 단속하는
풍요로운 농부의 마음이게 하여 주십시오.
낮엔 낙엽이 쌓이는 길마다
낭만이 가득하고
밤이면 사람들이 사는 창문마다
따뜻한 불이 켜지게 하시고
지난 계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랑의 대화 속에
평화로움만 넘치게 하여 주소서.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이야
머나먼 전설 속 나라에서 불어와
창문을 노크하는 동화인양 알게 하소서.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 주소서
9월에는
자질구레한 상념 떨치고
여름 내내 찌든 소금기를
모두 저 멀리 던져버리고
고추 잠자리 선회하는 하늘 보며
무장무장 희망의 나래를 펼쳐
피아노처럼 조율하고 싶어요
너만큼 기나긴 시간 뜨거운 존재 없느니.
뉜들 그 뜨거움 함부로 삭힐 수 있으리.
사랑은 뜨거워야 좋다는데
뜨거워서 오히려 미움받는 천더기.
너로 인해 사람들 몸부림치고 도망 다니고
하루빨리 사라지라 짜증이지.
그래도 야속타 않고 어머니처럼 묵묵히
삼라森羅 생물체들 품속에 다정히 끌어안고
익힐 건 제대로 익혀내고
삭힐 건 철저히 삭혀내는 전능의 손길.
언젠가는 홀연히 가고 없을 너를 느끼며
내 깊은 곳 깃든, 갖은 찌끼조차
네 속에서 흔적 없이 삭혀버리고 싶다.
때 되면 깊고 긴 어둠 속으로 스스로 사라질,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
하찮은 풀 한 포기에도
뿌리가 있고
이름 모를 들꽃에도
꽃대와 꽃술이 있지요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해도
갖출 것을 다 갖춰야 비로소 생명인 걸요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소박하게 겸허하게 살아가는
저 여린 풀과 들꽃을 보노라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견딜 것을 다 견뎌야 비로소 삶인 걸요
대의만이 명분인가요
장엄해야 위대한가요
힘만 세다고 이길 수 있나요
저마다의 하늘을 열고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
그 어떤 삶도 나름의 철학이 있는 걸요
어울려 세상을 이루는 그대들이여!
저 풀처럼 들꽃처럼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아도
이 하루 살아 있음이 행복하고
더불어 자연의 한 조각임이 축복입니다
6월에는
평화로워지자
모든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쉬면서 가자
되돌아보아도
늦은 날의
후회 같은 쓰라림이어도
꽃의 부드러움으로
사는 일
가슴 상하고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그래서 더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을
이제 절반을 살아온 날
품었던 소망들도
사라진 날들만큼 내려놓고
먼 하늘 우러르며 쉬면서 가자
5월이 오면 / 황금찬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산 숲내를 풍기며
5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꽃잎 진 빈 가지에 사랑이 지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놈일까?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5월은 4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려 있던 난초가
꽃피는 달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5월이다.
사랑하는 3월님, 어서들어오세요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일전에 한참 찾았거든요.
모자는 내려 놓으시지요
아마 걸어오셨나보군요
그렇게 숨이 차신걸 보니
사랑하는 3월님,
잘 지내셨나요? 다른 분들은요?
'자연'은 잘 두고 오셨나요?
오, 3월님, 저하고 바로 이층으로 가요.
말씀드릴게 얼마나 많은지요.
Dear March,
Dear March, come in!
How glad I am! I looked for you before.
Put down your hat
You must have walked
How out of breath you are!
Dear March,
how are you? And the rest?
Did you leave Nature well?
Oh, March, come right upstairs with me.
I have so much to tell
2023.3.09.토. 오후 3시 45분.
에밀리 디킨슨은 3월이 숨차게 왔다고 했는데
사연많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보내며
나또한 숨차게 3월에 도착했다.
이번 주 개강을 했고
본격적인 수업과 새학기,많은 일들이 시작된다!
한편의 시와 음악과 향기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내게 무사히 와준 3월,
내가 무사히 맞이한 3월,
활기차고 의미있게 잘 지내보자!
2월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12월에는
서쪽 하늘에 매달려있는
조바심을 내려서
해 뜨는 아침바다의 고운 색으로
소망의 물을 들여
다시 걸어놓자.
가식과 위선의 어색함은
더 굳기 전에 진솔함으로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는
버릇되기 전에 이해함으로
욕심과 이기심은
조금 더 양보와 배려로
소망의 고운 색깔에다 함께 보태자
우리의 살아온 모습이
실망스러워도 포기는 하지 말자
이젠 그리워하는 만큼
솔직하게 더 그리워하고
사랑을 깨달았던 만큼
열심히 더 사랑하고
망설였던 시간만큼 용기를 내어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리고
저문 해 바라보며
화해와 용서의 촛불을 밝히고
아직도 남은 미움,
아직도 남은 서러움 모두 태우자
우리에겐 소망이 있는
내일의 새해가 있으니까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산 숲내를 풍기며
5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꽃잎 진 빈 가지에 사랑이 지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놈일까?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5월은 4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려 있던 난초가
꽃피는 달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5월이다.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 술에
신목련 향은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 병아리 걸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길을 가야겠어요.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좋아한다는 말 대신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 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욱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없이 부칠테니
알아서 가져가실래요?
서먹했던 이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둥치에
새순이 파릇파릇 돋았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그늘이 되어주다가
열매를 맺어주다가
소슬바람에
밀려 나가는
노오란
은행잎 하나
人生如是亦如是(인생여시역여시)
인생은 이와 같고 또 이와 같은 것
*출처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김병기 지음-